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여 옛적의 교분으로 인해 벼슬과 식물과 전답을 내렸음에도, 도촌 할아버지는 모두 거절하였다. 그런데 성종조에도 도촌 할아버지께 벼슬이 내려진 기사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7년(1477년) 11월의 기사를 본다.
성종 73권 7년 11월 29일 (기사) 005 / 이조와 병조에 전지하여 정혼 등의 직첩을 되돌려주게 하다
“정혼(鄭渾)·신숙륜(辛叔淪)·허안수(許安秀)·김수정(金守丁)·정선기(丁善琦)·강자녕(康子寧)·이지(李枳)·김치지(金恥之)·이석동(李碩童)·박정동(朴丁同)·최치하(崔致河)·박익손(朴益孫)·윤중수(尹仲琇)·이순량(李純良)·권인손(權仁孫)·채신복(蔡申福)·유자분(柳自汾)·조평(趙枰)·이영기(李永期)·고선경(高善慶)·이세번(李世蕃)·고자승(高自升)·박종선(朴從善)·정맹지(丁孟知)·유순행(柳順行)·신우정(辛禹鼎)·태강수(泰康守) 이동(李仝)·돌산 부정(突山副正) 이광석(李廣石)·병산 부수(屛山副守) 이말정(李末丁)·박선경(朴善敬)·양준원(楊浚源)·이수형(李秀亨)·최치화(崔致華)·서영(徐穎)·김의로(金義露)·곽연벽(郭連壁)·김극공(金克恭)·오영보(吳永保)·최성해(崔成海)·노효원(盧孝元)·정효례(鄭孝禮)·이인화(李仁和)·김용지(金用智)·정순계(鄭順戒)·한종생(韓從生)·정인손(鄭麟孫)·강중만(姜仲萬)·김수정(金水精)·양근민(梁謹民)·이계희(李繼禧)·이직생(李稷生)·강순(姜順)·나종산(羅終山)·정제(鄭提)·김극정(金克精)·이금질구지(李金叱仇智)·박영춘(朴英春)·엄극유(嚴克柔)·고근(高謹)·한승조(韓承祖)·김효돈(金孝敦)·장영(張穎)·김복흥(金復興)·유득경(劉得京)·정효당(丁孝當)·박유정(朴有丁)·박유정(朴有精)·정혜통(丁惠通)·백수산(白壽山)·신중량(辛仲良)·김자온(金自溫)·이장손(李長孫)·하계손(河繼孫)·김춘길(金春吉)·박숭인(朴崇仁)·음자정(陰自精)·안겸(安謙)·강영춘(姜永春)·최달(崔達)·문효선(文孝善)·김의덕(金義德)·이귀손(李貴孫)·배양(裵良)·성계량(成戒良)·양수인(梁守仁)·조중미(曹仲未)·박을경(朴乙景)·최의로(崔義露)·최치(崔致)·김은영(金恩榮)·김돈피(金敦皮)·정순손(鄭順孫)·신윤(辛閏)·김의생(金義生)·한극효(韓克孝)·최숙손(崔叔孫)·황원순(黃元順)·맹수사(孟受思)·최연(崔漣)·염종계(廉終戒)·이석생(李石生)·이치(李致)·장익손(張益孫)·이문간(李文簡)·임자간(任自簡)·김찰(金察)·김일남(金一南)·김영(金瑛)·홍선(洪璇)·김종만(金終萬)·이소라(李所羅)·김익달(金益達)·정중기(鄭衆奇)·연수(延壽)·왕경자(王敬粢)·이윤형(李允亨)·이계원(李季元)·동청례(童淸禮)·황준경(黃俊卿)·고귀지(高貴之)·박효손(朴孝孫)·곽형동(郭亨同)·김계근(金繼勤)·송유산(宋宥山)·박총생(朴叢生)·최인로(崔仁露)·김후(金厚)·김간(金幹)·황효원(黃孝源)의 직첩(職牒)을 되돌려 주게 하라.”
하였다
이석: 관직명은 상세하게 나와있지 않아 알수는 없다. 그러나 작첩(품계와 벼슬 등..)을 다시 내렸다는 기록이 왕조실록 성종조 1477년 11월 기사에 나와 있음을 알수 있다. 이때에도 도촌 할아버지께서는 단종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절로 나가지 않으셨으므로, 벼슬을 받지 아니하셨음을 알수 있다. -[04/29]- 이석: 민족문화추진회 홈페이지 발췌 자료
국역 승정원일기 고종 7년 경오(1870 동치 9) 12월 24일(을유) 맑음 좌목 남계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